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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_사회

대영 ‘제국’

대영 제국

Empire : The Sun Never Sets

 

서방 세계에서 "제국"("Empire") 이라는 말은 수백년 동안 오로지 그들 스스로가 로마 제국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나라[1]에게만 적용해왔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전신인 "영국"("Kingdom of Great Britain") 로마 제국과의 거리가 국가였다. 물론 로마 제국과의 가까운 점을 찾는다면 과거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령으로써 존재하였던 점을 찾을 있지만 역사는 속령으로써 존재하였던 시기이므로 로마 제국과의 계승자로서의 연관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떻게 로마 제국의 계승자 라고 자처할 없었던 영국은 스스로를 "대영 제국"("The British Empire") 이라 부르며 제국으로의 재탄생을 이룰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의 계승자가 아니라면 한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인류의 1/5 속령으로 삼은 초대형 국가이던 대영 제국의 "제국" 어디서 것일까? 질문의 정답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무굴 제국과의 만남에서 부터 시작된다.

 

시작하기 앞서 글은 영국이 식민지 팽창 정책을 펼치며 제국주의 이념을 충실히 행하며 세계 제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얻은 제국의 타이틀을 제외하고 글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린다.

 

[1]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제국" 국가로는 대표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이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

East India Company

 

대영 제국의 "제국" 대해서 이야기에서 빠질 없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 동인도 회사" 이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595 네덜란드가 인도 할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이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설립된 개인 회사를 말한다.

처음에는 항해 때마다 개별적 기업체가 운행을 하였지만 점차 폐해가 나타나 1613 합자 기업체로 변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된다. 여담으로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찰스 2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 로서 확립하지만 그냥 알고 넘어가자.

 

<Flag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1801 - 1858>

 

<런던에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본사>

영국 동인도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로 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으며 주력 사업을 향료 무역으로 잡고 아시아와의 교역을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활동 범위를 늘리며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까지 빠르고 넓게 활동 범위를 가지며 거의 독점과도 같은 무역 활동을 있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는 자신들 보다 2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패배하고 17세기 말까지 인도로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후퇴를 하게 되지만 위기를 기회 삼아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며 아시아의 중심 무역기지로서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심하게 휘청이고 있던 무굴 제국을 향해 제국주의의 암수를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켈커타 위치>

 

 

무굴 제국의 쇠퇴기

Decline of the Mughal Empire

 

물론 과거 강성 하던 시기의 무굴 제국이라면 이렇게 손쉽게 영국 동인도 회사의 친입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굴 제국이 처음부터 약했던 아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때의 무굴 제국은 아우랑제브 대제가 이룩해둔 위대한 업적인 무굴 제국 최대의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재정난에 겪어야 했고, 엄청난 유지비를 감당해야 했으며, 이것들은 결국 세금을 내는 소영주들이나 일반 농민들에게 고대로 부담이 되었다.

 

<아우랑제브 대제>

 

<무굴 제국 최대 영토>

 

그리고 아우랑제브 1세는 무굴 제국의 오랜 역사의 종교 융합 정책을 포기하며 토후 세력과의 소모전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치권이 크게 역화 된다. 심지어 아우랑제브 1 치세 말기에는 비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인두세[2] 부활하고, 라지푸트 족에 대해서도 엄격한 정책을 취하면서 높은 세금을 감당해야 했던 소영주와 농민들, 심지어 궁정 귀족들까지도 정부에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아우랑제브 1세가 1707년에 데칸 고원에서 전사해 버린다.

 

< 위에 앉아 있는 아우랑제브 대제>

 

그의 죽음 강력한 군주가 뒤를 잊지 못한 귀족들의 부패와 토후들의 반란이 계속 이어졌고 결국 무굴 제국에 대항하는 여러 정권들이 인도에 등장 하게 되며 무굴 제국은 분열을 하게된다.

찢어질때로 찢어진 무굴 제국의 상처를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와 여러 열강들의 동인도 회사들은 이때다 하며 앞다투어 비집고 들어오게 되며 무굴 제국의 상처는 아물수도 없이 열강이라는 감염체에 의해 멸망으로 향하는 고속 열차를 타게 된다.

 

[2]사람 머릿수에 맞추어 걷는 세금. 소비세와 마찬가지로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도 과세하는 세금이다.

 

플라시 전투

Battle of Plassey

 

멸망행 고속열차를 무굴 제국의 단물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지금까지 해오던 향료 사업 대신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서부 인도 해안선을 이용하여 인도 면직물을 주력 사업으로 삼으며 인도에 대한 지배를 확대해 나간다.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의 지배력을 키우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는 유럽의 경쟁국들 국가가 자신들의 주무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는 것을 알게되는데, 바로 정체는 유럽에서도 7 전쟁[3] 하고 있던 프랑스 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벵골 지역>

 

원래부터 사이도 좋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에서도 신나게 싸우고 계신 프랑스와의 전투를 피할 없는 운명의 데스트니, 필연적인 숙명이었다.

양국은 7 전쟁의 연장선으로써 남의 나라의 땅에서 자신들의 무력 전쟁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남의 집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지만, 프랑스의 벵골을 중심으로 무굴 제국 전체를 통치하고자 하는 야망이 드러나버리고, 이는 주인 이었던 무굴 제국과 영국이 손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프랑가 무굴 제국 변방의 주요 왕국을 동맹 관계로 성립시키는 계기가 된다.

프랑스 군은 지역의 토후와 벵골의 태수 정규군과 연합하여 영국군을 격파하려고 했고, 영국 군은 무굴 제국과 연합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대망의 1757 영국의 로버트 클라이브 장군은 3000명의 군대로 벵골로 진격 했으며 벵골의 폴라시 에서 7만명의 프랑스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영국의 인도 지배권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폴라시 전투" 에서 영국군이 승리한다.

 

<영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동인도 회사의 총독. 로버트 클라이브>

 

 

<영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통상력은 물론 군사력까지 확립되었다>

 

[3]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을 말한다. 전쟁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게 되어 유럽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와 인도에 까지 퍼진 세계대전으로 번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약해지는 무굴 제국

Weakening Mughal Empire

 

프랑스와의 벵골의 지배권을 두고 싸운 플라시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영국 동인도 회사는 프랑스과의 플라시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포이"[4]유럽식 무기와 전술을 사용하는 인도인 군대 들의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리는 한편 가장 경쟁자가 사라진 벵골과 오리사 비하르를 실효지배를 작업에 착수하고, 결국 1765년에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의 황제로부터 양도 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실질적인 소유자가 된다.

면직 생산에 가장 중요한 토지와 원료를 생산하는 주민들의 지배를 무굴 제국으로부터 얻어낸 영국 동인도 회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도를 전부 지배할 생각을 한다. 인도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는 영국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들을 이용하여 갈갈이 쪼개진 무굴 제국과 인도를 손쉽게 유린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의 토후들과의 관계 개선을 해가면서 인도 내륙 지방으로 진출 준비를 한다. 준비를 끝마친 회사는 인도 지배라는 대업의 제물로서 1799 마이소르 왕국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복 사업을 시작한다.

 

<마이소르 왕국 국기>

 

<마이소르 왕국의 위치>

 

마이소르 왕국을 공국으로 격하시키고 자신들의 지배하에 회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마라타 동맹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이 총을 들이댔다. 당시 마라타 동맹은 아우랑제브 황제와 투쟁하며 3 째에 이르러 펀자브, 벵골 지방으로 까지 진출하고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까지 점령 하는 강성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1761 파니파트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두라니에게 패하며 인도 통일에 실패한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거기다가 자신들을 뭉칠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무굴 제국이 거의 멸망에 가까운 상태가 되자 점차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가게 되고 당연하다는 듯이 내분이 일어난다.

내분이 일어나 약체화되긴 했으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에 완강히 저항 하였고, 무려 3차에 걸친 마라타 전쟁 1818 영국 동인도 회사에 합병된다.

 

<마라타 동맹>

 

마이소르 왕국과 마라타 동맹을 흡수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43 신드를 합병하고, 1849년에는 펀자브를 병합하였다. 인도 내에 델후지 총독을 둠으로써 마라타를 비롯한 인도 내의 소규모 토후국들을 흡수, 합병 하였다.

 

<현재의 신드주 위치>

 

인도의 대다수의 지역을 차지한 회사는 붉은 요새(델리성) 근처로 대폭 축소되며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무굴 제국 대신 인도의 유일한 강자가 된다.

 

<붉은 요새>

 

착취

Exploitation

 

인도의 대다수를 차지한 회사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아래로 들어온 신민들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인도인들을 회사의 신민화를 해야했다. 방법으로 자국 영국의 면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에 대한 수입 관세를 높이고, 영국산 면직물에 대한 인도의 수입관세를 최대한 낮추는 정책을 시행한다. 정책의 결과로 수공업에 의존하던 인도의 면직물 산업이 무너지고, 인도는 영국의 산업 발달에 필요한 원료의 공급지 상품 시장으로 전락 해버린다.

그렇게 무너진 인도인들을 매우 값에 고용하여 면화와 , 아편 상품 작물을 강제로 재배하게 하는 농촌들을 강력하게 수탈하였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넘치는 !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을 영국 국왕에게 이양 점차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약해져갔다.

하지만 아무리 약해져 가는 영국 동인도 회사라도 인도에서 회사를 이길 있는 존재는 없었다. 점점 심해져가는 회사의 수탈과 강제로 고정된 지배 작물들로 인해 점점 인도 민중들은 반영 운동의 기운이 높아져만 갔다.

 

 

세포이 항쟁과 무굴 제국의 멸망

Indian Rebellion of 1857 And The fall of the Mughal Empire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침략과 수탈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1857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군인 용병들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인들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민족적 여러 문제로 인도인들을 하나로 뭉치기 어려웠던 세포이들과 주둔지에서 영국에 반란을 일으킨 인도인들은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2세를 "인도의 황제" 추대 하며 황제를 구심점 삼아 새로 정권을 수립한다.

봉기는 점점 확대되어 인도 북부 전체로 퍼져나아가게 되고,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인도 독립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세포이 항쟁 봉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수탈로 피해를 입은 수공업자와 농민, 지주등 폭넓은 민중들이 참가하였다.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2>

 

2년에 걸친 항쟁은 처음에는 세포이와 인도의 독립세력이 우세 하였지만, 영국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영국 동인도 회상의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점차 역전되었다.

영국군의 공세가 강해지며 승리가 확실시되자, 바하두르 2세는 후마윤 묘지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영국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1857 9 20일에 체포 되었고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 바하두르 2세의 지위마저 폐위시킴으로써 무굴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하무윤 묘지>

 

<후마윤 묘지에서 포로로 사로잡히는 바하두르 2>

 

 

영국 동인도 회사 폐지

British East India Company abolished

 

조국의 도움으로 세포이 항쟁에서 승리를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1858년부터 1874 전까지 인도를 간접 통치 했으나, 세포이 항쟁 전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의 힘을 축소시켜나가던 영국은 세포이 항쟁의 책임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찾으며 이를 계기로 자신들이 인도를 직접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접 통치 기간 동안 한다.

결국 영국 정부는 세포이 항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회사 운영을 정지 시키고, 인도 통치의 기능을 모두 빅토리아 왕에게 헌납하도록 다음, 동인도 회사를 1874년에 해산시킨다.

그리고 1876 5 1일부터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만들어낸 "인도의 여제" 라는 칭호를 빅토리아 여왕이 가지게 한다. 만든 이유 가장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빅토리아 공주의 남편이 독일 황제가 됨에 따라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아직 왕국인 영국의 여왕인 모후보다 지위가 높아지는 경우가 발생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이를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칭호가 만들어 진것이 가장 이유임을 모르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1877년에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인도 제국" 영국이 흡수하며 "대영 제국" 탄생하게 된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1876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여황제로 추대한 사건에 대한 정치 풍자화>

 

<인도 제국 국기 국장>

 

 

대영 제국

British Empire

 

영국 동인도 회사의 탄생으로 시작하고 인도 제국으로 끝난 이야기의 결말로 황제와 제국을 얻은 영국은 드디어 대영 제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인도의 여제" 칭호를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 7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칭호는 "인도의 황제" 되었다.

영국 - 인도 황제 또는 영국 여왕 - 인도 여제 군림한 영국의 통치자들은 인도와 관련된 공문서등에 자신들의 이름을 서명할 때는 자신들의 이름 뒤에 머리글자인 R I (Rex/Regina Imperator/Imperatrix) 또는 생략형인 Ind. Imp. (Indiae Imperator/Imperatrix) 사용하였다. -황제의 배우자인 왕비-황후의 경우엔 R이라고 서명하였다. 또한, 칭호는 조지 6세의 1948 동전들을 포함한 많은 영국 동전들에도 새겨진다.

 

 

대영 제국의 최후

The end of the British Empire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무너진 무굴 제국도, 2000천년 넘게 유지 되었지만 결국 무너진 로마 제국처럼 어느 제국이든 자신들의 이야기의 끝이 존재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 제국의 최후도 결국 오게 된다.

하지만 역사상 다른 제국들과는 다르게 대영 제국의 최후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시기를 인도가 독립한 시기를 꼽고 있다. 드물게 홍콩이 중국에게 반환된 시기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글은 인도가 독립한 시기를 대영 제국의 최후라고 보기로 한다.

왜냐하면 영국이 제국으로 불리게 가장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이 무굴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제국의 황제로서 등극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도 제국이 속령 들중에서 가장 알짜베기 였으며, 사실 로마 제국과의 연결고리가 별로 없는 영국은 본토 자체로 제국(황제국) 자처한 적도 없고 영국 군주로써 황제를 자처할 있었던 유일한 근거가 인도 제국에서 나온 황제위와 "인도의 황제" 라는 칭호 덕분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볼때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로서의 존속은 1947 8 15 인도 제국의 독립을 하고 조지 6세가 1948 6 22 "인도의 황제" 포기하는 순간을 대영 제국의 최후라고 글에서는 보고 있다.

 

<멘체스터 타운 홀의 명판에는 조지 6세가 "인도의 황제" 포기하기 전의 칭호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본토의 BBC 비롯해 많은 영국인들은 1997 홍콩의 반환식을 "제국의 종말" 간주하고 있다. 여담으로 정말 드물지만 지금도 남은 일부 속령들의 존재를 근거로 아직까지도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아직 남아 있는 영국 속령들>

 

 

끝마치며

End

 

영국은 인도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제국" 이라는 타이틀을 얻어내며 대영 제국이 된다. 대영 제국의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제국의 신민들이 착취를 당하며 살았을지 상상이 안된다. "제국" 결코 아름답지도, 신성하지도, 명예롭지도 않다는 것을 기억하자.

 

글은 대영 제국의 "제국" 이라는 타이틀에 초점을 맞추고 작성한 글이며, 결코 영국의 제국주의를 미화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로 시작된 글은 대영제국의 탄생을 담고 대영 제국의 최후로 끝을 장식하며 글을 마친다.

 

 

참조

Reference

 

나무위키 - 대영제국

위키백과 - 무굴 제국, 인도 제국, 인도의 황제, 영국 동인도 회사, 플라시 전투, 대영 제국

 

글의 작성자착한선비